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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전병이 되지 못한 도토리가루부침개의 이야기하루하루_음식과 문화... 2024. 1. 26. 18:31
메밀전병은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둥글넓적하게 부친 음식입니다.
강원도 정선, 봉평 등의 전통 시장에서 맛볼 수 있는 인기 최고의 음식이지요.
지금은 다양한 인스턴트 음식으로 변신하여
집에 편하게 앉아서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시끌벅적한 전통 시장 한구석에 설레는 마음으로 앉아
지금 막 구워 낸 메밀전병을 먹을 때의 그 맛이란,
도저히 따라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시작은 솜털처럼 가벼웠습니다.
보통때에서 조금 비껴서 생각했을 뿐입니다.
‘보통은 도토리가루로 묵을 만들어 먹지만,
이번에는 메밀전병처럼 만들어 보면 어떨까?’
계획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도토리가루 반죽을 얇게 펴서 소를 넣고 메밀전병처럼 부드럽게 둘러 만드는 것입니다.
우선, 도토리가루 반죽을 만듭니다.

도토리가루 반죽 살살 으깬 두부, 신선한 계란, 탱탱한 당면, 고소한 참기름,
톡톡 자른 부추 등을 넣고 휘휘 저어 속 재료를 만듭니다.
사실 계량기는 없습니다.
‘눈대중으로 대강 짐작하여 알맞게, 또는 적당히’ 넣어 섞습니다.

속 재료 이렇게 ‘메밀전병’을 따라가다 보니, ‘메밀꽃’으로, 더 나아가 ‘메밀꽃 필 무렵’에까지 이릅니다.
‘메밀꽃 필 무렵’은 이효석이 1936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입니다.
장돌뱅이인 허 생원이 자신과 함께 다니던 동이가
자신의 아들일까, 아닐까 하고 헤아려 보는 아슬아슬한 과정을 보여 주지요.
애정과 욕망, 그리고 혈육으로 이어진 정이 지니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성이 묻어나는 작품입니다.
그에 더하여 달밤, 메밀꽃 등 신비로운 우리 고유의 색깔을 마음껏 칠해 놓은 작품이지요.
이 작품에서 인상 깊은 장면은 물에 빠져 홀딱 젖어 덜덜 떨면서도
자신과 똑같이 왼손잡이인 동이를 보며 허 생원이 흐뭇해하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달이 기울어 어둠이 깔린 밤,
허 생원과 동이가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밭을 지나는 장면입니다.
잊으려 애써도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지요.
저 멀리 어딘가에서 허 생원이 탄 나귀의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는 듯합니다.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밭. 낮이 아니라 달밤이라면... [출처: Wikimedia Commons] ‘메밀꽃 필 무렵’으로 흘러간 의식을 다시 ‘도토리가루 반죽’으로 끌어와
프라이팬에 ‘메밀전병’ 꼴로 다독거려 봅니다.
“지지직!” 하며 프라이팬에 안착한 ‘도토리가루 반죽’은
순간 황금빛 미래를 기대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습니다.
도토리가루 반죽이 얇게 펴지지 않을뿐더러
이내 단단히 굳으며 ‘메밀전병’은커녕
거대하고 두툼한 부침개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도토리가루부침개 역시 현실은 냉혹합니다.
‘메밀전병’의 소가 되고자 했던 속 재료는
한순간에 처치 곤란한 형편으로 추락했습니다.
덩그러니 남겨진 산더미 같은 이 속 재료는
두고두고 볶음밥을 만들 때 써야겠습니다.
한동안은 끼니 걱정 없이 거뜬할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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