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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에서 비류를 생각하며 간짜장면을……여행 2024. 2. 29. 23:57
인천시 미추홀구 구월로에는 1956년부터 이어져 온 중국 음식점이 있습니다. 미추홀로 음식 여행을 떠납니다. 연중반점으로의 여행입니다.
미추홀, 미추홀, 이 말을 입안에서 자꾸 되뇌이다 보니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듯합니다. 네, 우리나라 삼국 시대의 역사에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유리를 태자로 삼자, 유리의 이복형 비류는 아우 온조와 함께 고구려를 떠납니다. 비류의 이복동생 유리는 북부여에서 먼길을 떠나 주몽을 찾아와 정당한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태자가 되고 나중에 왕이 되지요.
그 뒤 비류는 슬픈 운명을 피하지 못합니다. 고구려를 떠난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을 정하였지만 미추홀의 땅은 습한 데다 비옥하지 못하여 사람이 살 곳이 못 되었습니다. 이에 실망한 백성들은 비류를 믿고 따라 나섰던 마음을 접고 하나둘 흩어지게 되지요. 이 일로 온조를 볼 낯이 없다며 부끄럽게 생각한 비류는 스스로 이 세상을 떠납니다. 미추홀은 비류가 정한 백제 초기의 도읍지로, 본의 아니게 비류를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몬 땅입니다. 하지만 그게 어찌 미추홀의 잘못이겠습니까.
현실로 돌아와 메뉴를 펼쳐 듭니다. 옛날식 볶음밥도 맛있고 잡채밥도 맛있으며 짜장면도 맛있다고 합니다. 선택의 폭이 넓어질수록 마음은 점점 더 급해지고 머릿속은 지독한 혼란에 빠집니다. 밥을 먹을까, 면을 먹을까,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다가 결국 면으로 결정했습니다. 그것도 짜장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간짜장면을 먹기로 했습니다. 멀리까지 나들이를 나왔는데, 좀 더 제 자신을 대접해 주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짜장면은 6,000원이고 간짜장면은 9,000원입니다.
이 안에 계산서가 숨어 있습니다 짜장면은 고기와 채소를 넣어 볶은 중국 된장에 국수를 비벼 먹는 중국요리의 하나입니다. 간짜장면은 짜장면보다 물기를 좀 더 적게 하여 볶아서 만든 중국요리의 하나이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즐겨 찾는 이 짜장면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인천에서 시작된 요리라고 합니다. 중국에도 짜장면이 있지만, 중국의 짜장면은 우리나라에서 먹는 짜장면과 다르다고 하네요. 왠지 모르게 묘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짜장면’이 아니라 ‘자장면’으로 부르고 써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논란의 ‘자장면’입니다. 2011년 8월 31일 이전까지 우리는 ‘짜장면’을 ‘짜장면’이라고 부르지도 쓰지도 못하고 ‘자장면’으로 부르고 써야 했습니다. ‘자장면’이라는 형식적이고 딱딱하며 지극히 어색한 느낌, 그리고 낯간지러운 분위기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자장면’만이 표준어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는 표준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자’의 ‘ㅈ’이 ‘어떤 중국어 발음과 대응되는가?’ 하는 자세하고 구체적인 설명이 있으나 아무리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겠기에 생략하겠습니다.
결국 2011년 8월 31일에 현실과 동떨어진 ‘자장면’만 고집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자장면’과 ‘짜장면’ 둘 다 표준어로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자장면’의 독점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급하게 남긴 간짜장면의 경건하지 못한 한 컷 이제는 ‘짜장면’이라고 편하게 부를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간자장면’이 아닌 ‘간짜장면’이 도착했습니다. 이런, ‘간짜장면’이 제 앞에 놓이는 순간, 그 단아하고 먹음직스러운 모습에 깜빡했습니다. 얼른 먹고 싶다는 마음에 잊어버렸습니다. 소스를 면에 붓기 전에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간짜장면을 천천히 비비고 조용히 식사를 시작합니다. 쫄깃한 면발과 풍부한 소스, 그리고 튀긴 듯 고소한 계란프라이까지, 참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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